찬송가 304

 

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사랑이 어디든지 나를 감싸 줍니다.

내가 어머니는 주께 기도 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 때에 찬송부르십니다.

 

찬송가는 어머니주일 찬송으로 요한이 가사를 썼고 두회가 작곡을 했다  가사의 내용과 곡이 모두 아름답고 뛰어나다 

교회의 절기중에 5 첫째 주일은 어린이 그리고 둘째 주일은 어머니 재정되어 지켜왔다.   어머니 운동은

어머니 날의 어머니 알려진 안나 잘비스여사로부터 시작됐다. 운동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기까지는 잘비스여사의 딸인

 안나 잘비스의 활동에 힘입은 것이 크다. 그녀의 딸은 특정한 날을 택하여 어머니날로 정하고 또한 어머니 국제협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안나 잘비스는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공을 기리는뜻에서 카네이션 한송이씩을 가슴에

꽂아준 것이 전통이 되어 어머니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게 되었다. 어떤 자녀라도 어머니의 가르침을 떠날 수는 없다.

가르침 속에는 보호와 기도와 우리에 대한 기대가 있다.

 

찬송시는 1967 한국찬송가위원회로부터 어머니 찬송가 작시를 의뢰받아 지은 작품이다.

요한은 문인이요, 정치인이며 또한 한국경제발전의 일익을 담당한 상공인 이었다. 1900 10 14(음력)

공삼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목사는 평양의 선교사 마포삼열의 눈에 들어  그의 비서겸 조선어교사로

채용되었으며  평양신학교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믿게된 요한은 초등학교 입학전부터 구약을 줄줄이 읽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부친인 주목사가 동경의 조선인교회에 부임하게 되었고 요한은 동경의 메이지학원 중등부에 1913 입학했다.

중학교시절에는 문예지에 봄놀이라는 작품을 실리기도 했다. 그는 동경 1고에 지망했다. 메이지 중학교에서

성적 좋은 80명이 응시했다. 그러나 그중에 요한 혼자만 합격하여 아사히 신문에 크게 기사화되기도 했다.

1919 5, 3 . 1 운동이 있은지 두달 상해로 망명한 요한은 그곳에서 독립이라는 임시정부기관지의 편집인의 일을  

맡아 하는등의 독립운동을 했다.

 

1920년에는 호강대학에 입학, 화학을 전공했다. 그는 외국인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합창단원, 축구부선수, 야구부주장, 영어변론팀주장,

 교내잡지의 영문 주필, 주일학교위원장, 과학클럽회장 뛰어난 학창시절을 보냈다. 후에 동아일보에 입사, 학예부장, 평양지국장,

편집국장대리, 1929년에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요한은 동아일보재직중 차례(1926, 1929) 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후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경제계에 투신했으며 정치에 관심을 가져 1958 서울 중구 갑구에서 민주당 공천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장면 내각 때는 상공부장관과  부흥부장관을 역임했다. 또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특허협회, 노사문제연구회 등의 회장을 역임,

노년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활동을 하다가 1982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