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채명신 장군, 兵士 묘역 戰友 곁에 묻히

조선일보  입력 : 2013.11.29 03:03

 

베트남전 주월(駐越)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육군 중장 채명신 장군이 28 국립서울현충원 2 병사 묘역에 묻혔다.

화장한 유골을 모시는 평짜리 사병 묘지다. 장군의 묘지는 봉분을 쓰는 여덟 평이다. 장군은 건군(建軍) 이후 병사 묘역에 안장된 장성이다.

그는 서울 이촌동 집에서 동작동 현충원을 바라보며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 말했다 한다. 장군은 이제 뜻을 이뤘다.

그가 영원한 쉼터로 택한 2 병사 묘역은 파월참전자회 회장으로 베트남전 전사자 추모 행사를 열어 왔던 곳이다.

거기 잠들어 있는 1033 가운데 971명이 베트남전에서 숨진 병사다.

장군은 광복 평양에서 "함께 일해보자" 김일성의 손을 뿌리치고 월남해 육군사관학교 전신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처음 소대장으로 부임한 부대에서 남로당계의 근거리 조준 사격을 받고도 살아나 '군신(軍神)'으로 불렸다.

 6·25 때는 우리 최초의 특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었다. 그는 1965 8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3 8개월 동안 파월 장병을 지휘했다. 그가 올린 전과(戰果) 미국 언론으로부터 "2차대전 최고 승전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군은 한국군에 작전권을 주지 않으려다 장군의 탁월한 게릴라 전술에 놀라 작전권을 내줬다.

장군은 자신의 전공(戰功) 부하들의 희생 위에서 이룬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그를 치켜세우는 자리에서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를 20 넘게 모셨던 보좌관은 " 장군이 병사들의 죽음에 괴로워하며 막사에서 남몰래 통곡하곤 했다" 말했다.

장군은 부하들 목숨을 지키는 일을 앞세웠고 자신의 안위(安危) 뒤로 미뤘다. () () 넘어선 사생관(死生觀)

그가 웬만해선 철모를 쓰지 않으려 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병사들은 이역만리 전쟁터에서 그런 장군을 마음으로 따랐다.

장군은 박정희 소장의 설득으로 5·16 참여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군인이 있어야 자리는

적과 마주한 전선(戰線)이라며 군으로 돌아갔다. 장군은 6·25 이후 우리 군이 배출한 국민적 영웅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개헌을 말리다

대장 진급에서 탈락하고 군복을 벗었다. 그의 삶의 좌표는 '군인의 본분은 위국헌신(爲國獻身)'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휘호 바로 그것이었다.

어제 신문들은 장군의 행적을 전하는 사진으로 1966 그가 베트남전 전사자 묘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골랐다.

그는 대통령에게 전황(戰況) 보고하려고 잠시 귀국해서도 국립묘지를 찾았다. 채명신 장군은 전장에서 병사보다 발짝 앞에 있었고

세상을 떠나서는 병사들과 나란히 누웠다. 곁에 있는 병사들이 장군을 반기며 외치는 환호가 들리는 같다.